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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 4점

보석같은. 올해의 빛나는 발견.

1. 예술 영화, 독립 영화, 단편 영화.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다. 다만, 대체적으로 평이 좋은 그러니까 검증된 작품이라고 해야할까. 확실한 작품을 선별해서 보는 편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경우 사실 그렇게 끌리진 않았다. 왜냐하면 영화 소개에도 복이 넘쳐흐른다고하고, 제목도 복이 많다고 하는데 내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런데 무기력하고 힘든 지금. 누군가가 이 작품을 내게 추천해주었고 속는 셈 치고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영화를 구매했다. 그런데도 별로 안 끌려서 미루고 미루다가 대여시간이 2시간도 채 남지 않았을 즈음 돈 낭비하기 싫어서 억지로 틀어서 보았다.

2. 처음에는 그냥 그랬다. 전개도 평범하게 느껴지고 무난한 독립 영화겠구나싶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대사 "이제와서 말하지만 지감독의 영화는 별로였다. 잠이 많이왔다." 이 부분에서 완전 빵 터져서 그때부터 영화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나중에 영화가 다 끝나고 정보를 찾아보면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영화를 만든 김초희 감독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PD였다고 한다. 누군가를 특정하고 의도적으로 쓴 대사가 아닐지라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고, 영화가 내게 의미있게 다가온 순간이다.

3. 적당히 유머감각있고 현실적이지만 소소하게 희망찬 영화였다. 현실에 눌려 살지만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영화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적당히 지루하지 않게 하는 영화적 장치. 예를 들면 '장국영' 캐릭터도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현실적인 흐름을 깨게 만드는 캐릭터이기도한데, 영화니까 하고 이해할 수 도 있었다. 또한 그 캐릭터가 영화와 현실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캐릭터가 있어서 이 영화가 한편의 연극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장국영'은 찬실의 또 다른 자아. 또 다른 생각을 표현하는 캐릭터라는 감독의 인터뷰를 읽고 더욱 재미있었다. 단순히 속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굉장히 영리하다.

4.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와 느낌이 비슷하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거칠고 퍽퍽한 현실 속에서 내 삶을 쥐고 운용해나가려고 애쓰지만 마냥 비관적이지는 않다. 소소하게 희망차며 유머러스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소공녀>는 거의 6만명 가량의 관객이 보았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경우 2만 6천명 가량이 보았다. 만약 코로나 시국에 개봉하지 않았다면 <소공녀>와 비슷한 수치의 관객이 보지 않았을까싶다.

5. 또 다른 재미있던 장면은 영이가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고 하자. 찬실이가 황당해하며 "노올란~?"이라고 사투리로 말하는 대사였다.

6. 할머니 캐릭터랑 처음에는 서먹하지만 후에는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과정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7. 영화를 다 보고나서 너무 좋아서 감독의 인터뷰까지 꼼꼼하게 읽은 적은 별로 없다. 일단 취향이라는게 형성되기 시작한 후에는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찾기가 어렵고, 그 다음에는 양과 질이 충실하고 적절한 감독의 인터뷰를 찾기가 어렵다. 대게 관심끌기용 기사가 많다. 그런데 이 영화는 주연배우와 감독의 풍부한 인터뷰를 찾을 수 있었고 모두 검색해서 꼼꼼하게 읽었다. 그만큼 영화가 재밌기도 했으니 인터뷰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https://m.movist.com/people/view.php?c=atc000000003085&l=8

김초희 감독 인터뷰

https://m.movist.com/article/view.php?c=atc000000002798

강말금 배우 인터뷰

특히 감독의 인터뷰는 또 다른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읽고나서 놀랐던 점은 이름을 짓는것도 하나 하나 의미를 담아서 지었다는 것이다. 찬실이는 열매를 맺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지은 이름이고, 영이씨는 찬실이가 30대를 일만하며 보낸 회한을 담은 '젊음'을 뜻하는 Young에서 빌려온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캐릭터에 이름 하나도 의미가 있으니 캐릭터가 특유의 성격을 제대로 형성한거구나 알게되었다.

8. 왜 그렇게 이 영화가 좋았을까. 왜 이렇게 와닿았으며 왜 이렇게 공감이 되었을까. 바로 인생을 바라보는 감독의 가치관과 내 가치관이 같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의 상황이 나와 비슷한 점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영화 PD를 하다가 한 순간에 일을 잃고 삶의 기로에 선 찬실이. 나 역시 연극을 하다가 그만 뒀었고 지금은 인생의 기로에 있다. 찬실이 주변에는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영화계 식구들, 친하게 지내는 배우, 할머니 등등. 나 역시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일거리가 있으면 소식을 알려주는 친구들, 가족들. 여러모로 공감될 수 밖에 없는 영화였다. 비록 영화 속 주인공의 직업은 영화 PD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지만 그가 갖고 있는 고민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고민이다. 그래서 더욱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감독은 한 감독의 밑에서만 일하다가 실직했다. 자신의 지식이 모든 영화 현장에서 통용되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았고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알고지내던 배우가 도와줘서 일도 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그리고 그 시나리오가 잘 되어서 영화 까지 찍게되는 과정이 찬실이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인터뷰 내용도, 감독의 삶도 깊이 와닿았다.

9. 찬실이가 영이씨랑 잘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실 연애라는 것은 또 다른 길을 만들어줄 수 도있고 현실의 탈출구가 되기도 하는데, 연애라는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내 삶의 문제들이 희석된다. 이게 긍정적으로 작용되기도 하지만, 성장하고 고민하는 시기에는 긍정적인 영향으로 보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연애가 잘 된다면 더욱 뻔한 영화가 될 뻔했는데 인생의 한 줄기 인연으로 지나가서 다행이었다.

10. 그럼에도 희망을 말한다. 찬실이는 다시 내 삶을 가꿔나가면서도 영화의 꿈을 놓지 않기로 결심한다. <희망가>를 아코디언으로 연주한다. 연주하는 곡이 <희망가>여서 더 아릿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해나가는 것은 어렵다.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해나갈 것이다. 매번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고 또 위기는 오겠지만 찬실이는 잘 해낼것이고 살아갈것이다. 나 역시 내 꿈을 포기하지 않고 가끔은 희망가를 노래하며 계속 살아갈 것이다. 나도 찬실이처럼 시나리오부터라도 써봐야지.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지.

영화를 다 보고나서 느낌은 5점 만점에 3.5점 정도였는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나고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4점으로 올렸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에 올해 최고의 작품을 만났다고 평하겠다.

*영화 속 언급 영화들

에밀 쿠스트리차 <집시의 시간>

오즈 야스지로 <동경 이야기>

<아비정전>

<베를린 천사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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