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장강명

민음사

2015

소설

평 4점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행복을 그러안고 살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1.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무척 느린 편이다. 상상해가면서 읽고 좋은 의미는 아주 느리게 마음에 담아가며 본다. 그런 내가 정말 가독성 좋게 읽은 책이다. 무려 약 3시간여만에 뚝딱 읽었다. 82년생 김지영 다음으로 빠른 속도였다.

2. 내가 20살 초반부터 툭하면 '나중에 워킹 홀리데이를 갈거야.'라는 말을 쉬이 하곤 했다. 그것은 지금도 변치 않는다. 마치 워홀에서의 삶은 더 행복하고,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처럼 말이다. 이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그걸 정말 실천에 옮긴 20대 후반 여성의 삶을 그린다. 어느 순간 갑자기 끈이 뚝 끊긴 것처럼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옭아매던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놓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워홀, 이민을 가는 호주로 떠난다.

3. 그저 도피성으로 삶을 찾아 떠나면 내가 겪게 될 일을 보여주는 예언집 같았다. 게다가 이 책을 쓴 사람은 남성인데다가 20,30대도 아닌데 현재의 20대 여성의 마음을 어찌나 잘 아는지, 책갈피하고싶은 구절이 너무 많아서 책을 덮고 나니 온통 포스트잇 투성이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을 모두 성취하는 그런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단순 도피식이라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겪은 일은 외국에서 또 다시 되풀이된다.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것.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내가 느끼는 삶에 대한 관점이 같아서 꽤나 잘 보았다.

오랜만에 꽤 괜찮은 작품을 보았다. 향후 장강명 작가의 작품 <표백>, <알바생 자르기>, <5년만에 신혼여행>을 읽어볼 계획이다.

 

11p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깨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았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걸 따져.

16p

아침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현역에서 역삼역까지 신도림 거쳐서 가 본적 있어?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돼.

19p

회사에서 일할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 같아. 내가 어떤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서 그 톱니바퀴가 되었다고 해도, 이 톱니바퀴가 어디에 끼어있고 이 원이 어떻게 굴러가고 이 큰 수레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그런걸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난 내가 무슨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회사는 뭐 하는 회사인지 모르겠고, 온통 혼란스러웠달까. 아니 아예 알려고하지도 않았지. 중고생과 다름 없었던 거 같아.

32p

그렇게 기차역까지 두어 블록을 걸어가는데, 오랫동안 상상하고 기대하기만 했던 일이 눈 앞에 현실이 되어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분이 들뜨더라.

103p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서울이 옛날이랑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야. 나아지는게 없어. 내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보장은 아무 데도 없어.

117p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려면 위험하게 살아야해. 키에나."

엘리가 발코니 난간에 기댄 채로 말했어. 자긴 그래서 익스트림 스포츠를 한대.

120p

사실 지루한 얘기는 두 가지 뿐이었어. 은혜 시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미연이 회사이야기. 그런데 은혜랑 미연이 그 두 얘기를 너무 오래하는거야. 몇년 전에 떠들었던 거랑 내용도 다를 게 없어. 걔들은 아마 앞으로 몇 년 뒤에도 여전히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을 거야. 솔직히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없는거지. 걔들이 원하는건 "와, 무슨 그런 쳐죽일 년이 다 있대? 회사 진짜 거지같다. 한국 왜 이렇게 후지냐."라며 공감해주는 거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냐. 근본적인 해결책은 힘이 들고, 실행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회사 상사에게 "이건 잘못됐다."라고, 시어머니에게 "그건 싫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무서운거야. 걔들한테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너무나 소중해.

시드니에서 매일 크고 작은 모험을 겪고 있어서 그런가, 옛날 친구들이 좀 얄팍해 보이더라. 내가 걔들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거나, 내 미래가 더 밝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125p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게 더 위험해.

147p

한국에서 살아도 그냥 전업주부로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 딱히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한국의 구직 시장이 어떤지도 몰랐어. 그래도 일은 하고 싶었어. 은혜도 그렇고 학생 때는 똑똑하던 여자애들이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바보 되는거 많이 봤거든.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부딪치고 그러지 않으면 되게 사람이 게을러지고 사고의 폭이 좁아져.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게 되고. 난 그렇게 되기 싫었어.

151p

그렇게 생각하니까 회계사의 앞날도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더라고. 지금이야 시험으로 사람 수 조절하니까 고수익일 수있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자동 회계 프로그램 같은 걸 만든다면? 회계는 정말 그런 프로그램이 나올 수있어. 어떻게 보면 당연한건데, 내가 뭘 하겠다고 나서건 그게 성공할지 안할지는 몰라. (중략)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직업이 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전망 얘기하는 건 무의미한거고, 내가 뭘 하고싶으냐가 정말 중요한거지. 돈이 안벌려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좀 덜 억울할거 아냐.

152p

내가 아는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원만 벌어도 돼. 집은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것 까지 팔고 싶지는 않아. (중략) 또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서 작더라도 뭔가 봉사를 하고 싶어.

154p

우리는 뭐랄까. 전래 동화의 의 좋은 형제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지. 지명이는 나를 아껴. 나도 걔를 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 사이에 개선 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밤에 서로 상대 몰래 볏짚을 나르느라 몸만 피곤한 상황이었지. 언젠가는 우리가 달빛 아래 볏짚을 든 채 마주치게 돼 있었어.

161p

너무 고맙고 미안했어 .하지만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유로 내가 네 옆에 있을 수는 없어.

184p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중략)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 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195p

물려받을 만한 경제력을 지닌 부모가 있거나(재력), 명문대를 나왔거나(학력), 빼어난 외모(체력)라도 타고 났든가 해야한다. (중략)

생득적인 재력이 전제되면, 사교육과 성형을 통해 학력과 체력은 후천적으로 쉽게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타고난 재력이 없다면, 나머지는 그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날이 갈수록 인생 역전을 빌며 매주 복권 사는 사람만 는다. 공정에 기댈 수 없는 사회에서, 우연에 기대는 현상의 증가는 필연이다.

198p

가까이에서 보면 정글이고, 멀리서 보면 축사인 장소가 한국이다.

반응형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췌독] 포체티노 인사이드 스토리  (0) 2020.04.05
새벽 5시 습관형 인간을 위한 블랙 워크북  (0) 2020.04.03
하루 5분 아침 일기  (0) 2019.10.16
나만 안 되는 미스코리아  (0) 2019.10.15
숨결이 바람 될 때  (0) 2019.07.09

+ Recent posts